* 4편 연재(소랑도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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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지나면 바로 소랑도와 연결된 소랑대교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09시 50분 무렵, 소랑대교를 통과해 소랑도로 들어갔다. 대교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싶은데, 차량 교행이 가능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호칭하는 걸까?
『소중한 섬, 소랑도
랑(낭)만이 가득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도시를 꿈꾸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특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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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를 건넜더니 표지석이 여행자를 반긴다. "수고 많았소. 어서 오시게" |
길도우미 지도를 봤을 적엔 조금 큰 섬인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았다. 대교를 지나 섬 왼쪽 해안을 따라 도로가 놓여 있었다. 그곳으로 진입했더니 금방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안쪽에 소랑보건진료소와 오른쪽으로 마을회관이 보였다. 오토바이를 그곳에 주차했다. 바로 앞엔 정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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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랑도 전경, 360도를 회전하며 찍은 아래의 영상에서 상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진료소 왼쪽으로는 배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장비가 있고, 그 앞은 양식장인 바다다. 세대수는 대략 50가구 안쪽일 것이다. 아내와 영상통화를 연결해 360도를 돌면서 섬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토바이로 언덕을 올라갔다. 역시나 건조 공간과 보관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진료소로 내려갔다. 작은 섬이라 금방이었다. 정자에서 할머니 세 분이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메모지를 들고 가까이 다가간다.
“할머니! 정자에 올라가도 되나요?”
“응!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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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는 마을 바로 앞 바다, 중간은 섬에서 먼 바다, 아래는 진료소 앞 정자에서 쉬는 할머니들! 대화를 나눴다. |
꾸벅 인사를 하고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의외로 시원했다.
“혹시나요 할머니! 소랑도가 고향이세요?”
“아녀! 벌교여.”
할머니 세 분 모두 소랑도가 고향은 아니었다. 젊었을 적에 시집온 곳이란다.
“그럼 혹시 『김방례』라는 분 아세요?”
“뭐여?”
“‘김자 방자 례자’인데요. 장모님 이름입니다. 여기 소랑도가 고향이세요. 혹시 아시는지요?”
“모르것는디?”
아쉬웠다. 모르신다니 어쩌겠느냐 하며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곳 소랑도는 몇 가구나 있나요?”
“한참 때는 100가구가 넘었어.”
“지금은요? 여기 앞에 보이는 곳 말고 마을회관 넘어 반대편 쪽에도 집들이 보이던데 민가가 있나요?”
“아녀! 여그 뿐이여! 너머에는 보관창고여.”
“여긴 한 50가구 정도 보이는데요.”
“그 정도 될 거여.”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할머니 두 분이 더 오셨다. 혹시나 싶어 다시 물어본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혹시 『김방례』라는 이름을 아세요?”
“뭐? 김방례?”
“네! ‘김자 방자 례자’입니다. 소랑도가 고향이세요.”
“알지라! 결혼해서 살다가 부산으로 갔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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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는 할머니 두 분이 더 오셨는데, 왼쪽에서 두 번째 계신 분이 '이준단' 할머니다. 아래는 섬 언덕에서 촬영 |
이럴 수가! 장모님을 아시는 분을 만나게 되다니 이런 행운이 있을까 싶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들 대화 중에 틈틈이 일문일답하면서 궁금한 것을 여쭈었다.
“여기가 고향이세요?”
“아녀! 시집 왔제라.”
“저의 장모님을 아시게 된 것은 언제인데요?”
“나가 시집왔을 때지!”
“결혼하고 오실 적에 몇 살이셨는데요?”
“20대에 왔어.”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적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그리움이 넘친다』
※적확하게 – 조금도 틀리거나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고 확실하게
짧게 짧게 대답하신다. 기억을 더듬는 모습이 역력했다. 계속 여쭈었다.
“그때가 1950년대 정도인가요?”
“그려. 아마도 그때지!”
“그때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미역도 했지만, 『해우(해우라고 들었다)』를 많이 했지.”
“해우가 뭔데요? 처음 들어요.”
“김이여 김. 김도 몰라? 장모가 여그 사람이람서.”
김을 해우라 부르는 줄은 몰랐다. 알 리가 있나! 반갑고 조급한 마음에 계속 여쭌다.
“김을 많이 했나 봐요? 수익이 나려면 정말 많이 해야 할 건데요.”
“많이 했제. 방례도 많이 했어.”
“할머니! 할머니는 존함이 뭐예요? 이름요!”
“이준단이여!”
“이준단요? 준자 단자 둘 다 받침이 니은인가요?”
"뭐라는거여?"
"이름 준자하고 단자요! 밑에 받침이 니은인가요?"
“그려! 이준단이여.”
『이렇게 기다렸던 기쁜 소식을 들려주신 분이신데
준비한 선물이 없어 사례를 드리진 못했습니다.
단단히 기억하겠습니다. 이준단 할머니! 오래도록 건강하세요!』
할머니들끼리 동네 돌아가는 얘기하는 중간에 질문해야 해서 마음이 조급했다.
“김을 양식했나 봐요?”
“아녀! 해우는 자연산이여. 양식하는 김은 『패각(패각이라고 들었다)』이라 하는디, 지금은 양식을 많이 해.”
“그럼, 자연산 김을 바다에서 직접 채취한 거예요? 힘들었겠는데.”
“아따 많이 힘들었지. 자연산 김을 따는 것이 힘들지만 돈이 되거든.”
장모님 얘길 하려는데 또 동네 돌아가는 얘길 나누신다. 어렵게 끼어들었다.
“저희 장모님은 어떠셨어요?”
“해우일을 많이 했제. 그라고 밭일하고 논일도 많이 했어.”
“밭하고 논이요? 여기 논밭이 있어요? 논이라면 벼농사인가요?”
“그려. 저짝으로 넘어가면 밭하고 논도 있어.”
“그럼. 장모님이 여기 계실 적에 장모님 친가가 괜찮게 사셨네요. 밭하고 논도 있다는 걸 보니까요.”
“그려!”
“일하시고 저녁으로는 뭘 하셨어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20대 때 시집오셨다는데, 밤에 뭘 하겠나! 그걸 질문이라고 하다니. 장모님과 친구들을 연결해서 물었어야지.
“저녁으로 하긴 뭘 혀? 불도 없고 초롱불 뿐이었는디 일찍 자야제.”
“20대 때였다니까 저희 장모님과도 어울렸을 거 아니에요. 뭐 마실 막 다니면서 막걸리라도 마시면서 수다 나누셨나요?”
이분들 젊었을 적의 모습이 정말 궁금했다.
“마실 많이 다녔제. 녹음기 들으면서 막걸리도 마시고, 소주도 마셨어.”
“녹음기라면 음악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제!”
“소랑도에서 학교 가려면 저기 금일읍으로 가셨나요?”
“그랬제. 그라고 그기 장모도 배를 많이 탔어. 엔진이 없는 배를 탈 적에는 방례가 직접 노를 저었어. 나중에는 엔진 있는 배를 탔고.”
중요한 질문을 해야 했다.
“혹시 저희 장모님 사셨던 집을 아시나요?”
“그럼. 바로 저기여. 지금은 허물어버려서 집이 없는디, 저기여! 집 사이에 빈 곳이 보이제? 그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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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진 중간 위에 집들 사이 빈 곳이 보인다. 중간 사진에서 보듯이 집터가 밭으로 변했다. 아래는 마당을 올랐던 계단 |
『터를 이루고 살았을 당신을 상상합니다.
전에 없을 그리움에 사무치더라도 부디 용서하세요』
할머니께서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집들 사이로 공터가 보였다.
“그기 장모가 여그 살 때 밭하고 논도 있고 괜찮았어.”
“아! 그러셨어요?”
오래된 기억이라서인지 말씀을 상세히 여쭈어야 했고, 생각을 더듬으면서 떠올리셨다. 대답하시다가도 할머니들끼리 소소한 동네 이야기를 계속 나누셨다. 물론 내가 알 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이준단』할머니는 자신의 바깥양반이 장모님 외삼촌과 동갑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말씀으로 할머니와 장모님이 정말 아셨던 사이라고 확신했다. 계속 묻고 싶은데, 할머니들 대화를 중간에 잘라야 해서 대화가 더는 지속되지 않았다. 어떻든 중요한 정보를 많이 들었다. 너무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 기억을 못 하시는 것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묻는 것에 답하는 것이 힘드셨는지
“장모가 죽었다면서 그걸 이제야 왜 물어?”
라고 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김방례라는 세 글자에 담긴 그리움과 사랑
방심하던 차에 할머니 말씀으로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과 사랑
례(예)전부터 그러했음에도 사위된 자로서 알지 못했던 것이지. 불효일지라!』
정리하자면, 소랑도에 장모님이 사실 적에 집안 사정은 괜찮았다. 대신 일을 많이 하셨다. 낮에는 김을 채취하고, 논과 밭일도 하셔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직접 노질도 하셔야 했다.
생가가 있었던 터를 확인한 것은 정말 소중한 수확이다. 내가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장모님도 해가 지면 친구들 집으로 마실 가셔서 소소한 담소를 즐기셨을 것이다. 막걸리며 술잔을 같이 나누시며 녹음기로 음악도 들었을 것이다. 술을 못하셨더라도 같이 마시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10대와 20대를 지날 적에 나도 친구들과 같은 경험을 했고, 누구든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 나이 때에 장모님은 내가 그러했듯이 같은 삶의 방정식을 당연하게도 공유하신 것이다. 그러셨다.
“여그 더워! 저기 노인회관에 가자고.”
“네! 할머니 좀 있다 찾아뵐게요.”
메모를 대충 마무리하고 곧장 장모님 생가 터가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이미 밭으로 활용 중이었지만,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있었다. 집 마당에서 도로 쪽으로 내려오도록 시멘트 포장이 된 계단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돌들로 층층이 쌓아 진입할 수 없도록 했고, 그 덕분에 밭의 높낮이가 수평을 맞추었다.
그곳에 서서 보건진료소 쪽과 좌우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절에 장모님께서 수없이 바라보았을 전망을 내가 바라보고 있다. 그림이 예쁘다. 섬의 앞바다와 그 바다에서 영글고 있을 양식장 식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넓은 바다 방향으로는 높은 언덕이 있어 강한 비와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딱 그 장소만 안전해 보였다. 모진 폭풍과 태풍에도 안전했기에 그곳에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마을회관에 갔더니 식사를 하시려고 음식 만드는 중이셨다. 여러 할머니가 놀고 계시어 더는 말씀을 나누기 어려웠다. 건강하게 잘 계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때인데 소랑도엔 식당이 없다.
『안녕! 잘 있어라 소랑도야!
녕(영)원토록 그 자릴 잘 지켜주길 바라. 또 올께!』
*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