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일 차에 이어 계속(3편)
3일 차, 김제 – 목포 – 완도 방향으로 달렸다.
연이틀 더위 때문에 고생해서 난방을 끄고 잤다. 실수였다. 새벽에 추워서 뒤척이다 깼는데, 희한한 꿈을 꾸었다. 어릴 적부터 추운 곳에서 자면 악몽... 그러니까 누군가(로보캅, 뱀파이어 등)에게 쫓기거나,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계속 추락하는 꿈을 꿨다. 근데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학교 선생님이었고, 콜라를 사두었는데 누군가 몰래 마셔버린 것에 폭발해 일장 훈계를 하는 꿈이었다. 근데 몰래 마신 학생이 2일 차에 내게 점심을 사준 박** 고문이었다. 웃겼다. 이분은 현실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일기예보를 검색했더니 4일 차인 목요일에 비가 온단다. 4일 차는 남해를 돌아보는 일정인데.... 비야! 안 오면 안 되냐?
김제 평야를 지날 때는 음식을 음미하듯 오토바이를 천천히 움직이며 논과 밭과 저수지 등을 구경했다. 이미 모내기를 끝낸 논도 있고, 논갈이를 끝내고 모내기 준비를 마친 곳도 있었다. 모내기를 끝낸 바로 옆 밭에 옥수수 줄기가 건강하게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옥수수를 너무 좋아해서 눈에 잡힌 것이지 싶다.
정읍대로에서 잠시 멈췄다. 도로 사정이 매우 훌륭했다. |
목포를 향해 달리다가 정읍대로에서 잠시 멈췄다. 잘 뚫린 도로와는 달리 지나는 차들이 별로 없다. 함평군 나산면 소재 함장로에서 쉴 목적으로 바이크를 세웠을 적에 약 110㎞ 거리를 달렸는데, 정말 도로 사정이 완벽했다. 계속 시속 100㎞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었기에 제법 먼 거리를 주파하고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함평군을 통과하던 중, 정확히 08시에 길옆에서 날아든 참새가 오토바이와 충돌했다. 그 녀석이 부딪힌 곳이 오른쪽 백미러였는데, 시속 100㎞로 주행 중이었기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참새의 명복(?)을 빌었다.
『참으로 슬픈 참새야
새로운 세상 찾아 날갯짓할 것이지 어찌 내게 부딪힐거나
를(을)씨년스러운 날이로다. 부디 나를 원망하거라.
애도하는 마음뿐임이 미안하구나!
도로에서 멈춰 너를 거두고 양지에 묻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참새야! 다행이잖니! 나는 무사해서 말이다.
다만 잊지 않으마. 자유로울 너의 영혼을』
함평군 나산면 소재 119 안전센터 |
쉬는 장소 길 맞은편에 119 소방센터가 있다. 화장실 때문이라도 반가웠다. 그런데 쉬는 곳인 버스 정류소 바로 옆에는 무단으로 버려진 쓰레기가 더미를 이루고 있다. 조금 더 모으면 산이 될 정도인데, 해당 관공서는 뭐하나?
목포에서 처음 찾은 곳은 스카이워크인데, 아직 완공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곳 왼쪽으로 그 유명한 해상케이블카가 지나가고 있다. 아래는 시원하게 트인 바다이고, 주변 경치도 아름다워 많이들 찾는다고 들었다. 미리 준비한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가 찾아간 곳은 목포 근대역사문화거리 가는 방향에 있는 항동시장이었다. 시장 내부를 돌아보았는데, 기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재래시장 어디에서나 볼 법한 그런 곳인데, 느낌으로는 재래시장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것 같았다.
목포 항동시장 입구 |
근대역사문화거리를 구경하는 중에 매우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바로 변**였다. 유튜브에서 수도 없이 본 얼굴이라 모를 수 없었다. 키는 좀 큰 편이고, 배가 나왔다. 오른손에 커피를 들고 일행 2명과 같이 그 거리를 지나갔다. 사인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는 나중에 들었다.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분주했다. 찾는 사람이 많았다. 관광버스도 계속 들락거렸고, 해설사들이 일행들을 데리고 바삐 다니며 설명에 열심이었다. 그곳에서 두 곳을 방문했다. 하나는 구) 일본영사관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구) 목포3해역사령부 헌병대 옛터인데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놓여 있다. 구) 일본영사관 건물에서 입장료(2천 원)를 지불했더니 1관과 2관을 다 돌아볼 수 있단다. 참고로 외지인 성인 기준으로 1인 2천 원이고, 매표소 직원이 혹시나 할인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계속 확인해보란다.
목포근대역사관(일본영사관)과 내부 전시된 자료들 |
구) 목포3해역사령부 헌병대 옛터!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2관이 놓여 있다 |
두 건물 내부에 진열된 것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목포의 근대사 특히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를 기록해두었다. 그만 돌아나가려다가 오래된 건물이 커피숍이라 발길이 향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커피가게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일하는 사람에게 건물 내력을 물었다. 그들 말로는 무려 125년 된 적산가옥이라 한다. 2층까지 돌아보았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건축 방식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기억과 추억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나는 행복한 중년 남자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분포(상단 왼쪽), 125년된 적산가옥(아래)과 주문한 커피(상단 오론쪽) |
인접한 항동시장으로 다시 향했다. 시장을 돌아보면서 눈여겨본 식당이 있는데, 낙지볶음 요리를 한다고...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때인데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42년생이라 소개한 주인 할머니 혼자서 식당을 사수하고 계셨다. 낙지 요리 1인분 주문해도 되냐 물었더니 흔쾌히 제공하시겠단다. 낙지볶음을 맵지 않게 부탁했다. 3만 원이라 비싼가? 생각하는 차에 할머니가 요리하는 낙지를 신안 개펄에서 잡았고 매우 싱싱하다네! 다행이었다.
낙지볶음 요리. 혼자 먹기엔 많았다. |
왜 손님이 없는지? 질문에는 신안 쪽으로 대교가 놓인 이후로 항동시장이 죽어가고 있단다. 돌아보면서 내가 느낀 것이 틀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위해 찾는 손님이 오히려 많고 낮에는 없단다. 내가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찾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옆에 있는 재래시장이 왜 불황이냐? 했더니 둘러보고는 다들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한다.
할머니 요리 솜씨는 인정해야겠다. 낙지볶음 요리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맵지 않았고 끝맛은 달콤하면서 계속 땡겼다. 제공된 반찬 중에 압권은 낙지 젓갈이었다. 밥에 비벼 먹어도 맛있는데, 배추 데친 것을 젓갈에 묻혀 밥과 함께 먹어보라며 할머니가 권한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런 맛이 나오다니.
할머니께 밥 한 공기와 젓갈, 배추 데친 것을 도시락으로 포장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흔쾌히 싸주셨다. 세상에 이걸 1천 원만 받으신다. 낙지볶음 3만 원, 공깃밥 1천 원, 도시락 1천 원 합계 3만 2천 원으로 저녁까지 해결한 것이다.
식사하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대중 기념관’으로 갔다. 바로 인근이었다. 한때(정확하게는 20대까지)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로 오해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적에 정말 슬프게도 울었다.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제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며 나라 걱정하면서 마실 줄도 몰랐던 소주를 들이켜며 울었다. 정말 그랬다.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과 알프레드 노벨(전시 자료) |
빨갱이라는 오해는 뜻밖의 소동으로 풀렸다. 당시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이걸 극우와 보수진영에서는 로비해서 받는 것이라며 여론을 몰아갔다. 그 노벨상 사건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김대중을 빨갱이라 오해했을 수 있다. 고향 사람들은 정말 김대중을 빨갱이라 믿었고, 여전히 그 상태인 사람들도 많다. 그 중엔 내 친구들도 있다.
천하의 노벨상을 과연 로비로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의문을 내가 가진 것이다. 인터넷이 가능해진 시기(전자정부를 구현한 것은 김대중 정부의 공이다. 인정할 건 하자.)라 나름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조사를 하다가 그러다가 문제의 서적인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게 된다. 경위는 알 수 없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명단(위) |
그 책을 다 읽었을 무렵 충격에 빠진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내가 배웠고, 알고 있던 근현대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길로 이영희 교수 작품 전집을 모두 사서 읽었으며, 나를 옭아매고 있던 그 빨갱이 논리가 비로소 깨졌다. 나중에는 김대중 자서전까지 사서 읽었음은 물론이다.
김대중! 서거하셨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이다. 기념관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목포 갓바위로 향했다. 그곳도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인데, 해양보행교를 걸어 들어가야 실물을 볼 수 있다. 보행교 이용 시간은 06시부터 23시까지다. 신기하게도 갓처럼 생겼다. 갓을 쓴 김삿갓이 연상되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의 풍화작용이 빚은 걸작이다.
목포 갓바위 |
구경을 마치고 주변 주차장 그늘에서 여행기를 메모 중인데, 어르신 한 분이 인사를 건넨다. ‘최종인’이라 하고, 바이크 번호판에 ‘기장’이 적시된 것을 보곤 자신도 인연이 있어 이것저것 물으신 거다. 자신이 신혼여행 때 기장엘 갔었단다. 한참을 얘길 나누다 헤어졌다.
숙소가 있는 완도로 향했다. 경유지로 해남 땅끝 송호해수욕장과 여객터미널을 선택했지만, 지난 여행 때 돌아보았던 터라 따로 시간을 들여 구경하진 않았다. 송호해수욕장에서 잠깐 쉴 적에는 두 손이 심하게 저렸다. 전기가 흐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속 100㎞ 내외로 맞추기 위해 미세하게 힘 조절을 계속하다 보니 오른손에 더욱 무리가 갔다. 그래서 비싼 것이 좋은 것이여!
터미널을 통과해서 완도로 넘어가기 전에 시골마을을 지났다. 도로 양쪽으로 황금빛으로 물든 농작물을 보고는 어릴 적 고향 생각에 잠긴다. 옛 기억을 소환한 농작물은 밀이다. 밀 농사가 한창인 도로 옆에 바이크를 세워 카메라를 켰다. 친구들과 밀을 구워 먹던 기억이 아련하다. 어른들은 농사를 망친다며 야단이었지만, 시골의 소년들에게 잘 익은 밀은 군것질 대상이었다. 소년들을 야단친 어른들조차도 같은 경험의 소유자다. 때문에 심하게 야단치지 않았다.
잘자란 밀을 보면서 향수에 잠기다. |
군불을 넣고 숯불이 약하게 남았을 적에 밀을 구웠고, 그 고소함이란…. 익어가는 냄새는 소년들 침샘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렇게 시골 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단련시키고 성장시켰다. 소중한 먹거리였던 셈이다.
숙소에 도착하여 주인의 안내로 하룻밤 묵을 방을 확인했는데, 정말 혼자 머물기 아까울 정도였다. 펜션이 언덕에 있었고, 그 아래로 몽돌해수욕장이 보였다. 주변 경관도 빼어났다. 펜션을 지키는 똥개가 이방인이 도착해서인지 그렇게나 짖어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주인이 나를 안내하면서부터 이 녀석이 거의 빛의 속도로 태세 전환을 한다. 꼬리를 흔들면서 나보다 앞서 방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이놈도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것인가?
‘저리 가라 이놈아! 신나게 짖을 때는 언제고, 반가운 척하기는!’
펜션 내부 모습, 영상 올리는 방법을 몰라 정말 아쉽다. |
저녁식사는 점심때 항동시장 입구의 식당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비록 밥은 식었고, 젓갈과 데친 배추가 섞였을지라도 그 맛은 여전했다. 할머니 감사해요... 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주변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고, 마트도 없는 것 같았다. 숙소 방향으로 진입하는 길에 마을 구판장을 봤다. 1.5㎞ 후방일 것이다. 마을 구판장이라니.
* 다음 편에서 계속